어둠의 식물, 이끼의 재발견

어둠의 식물, 이끼의 재발견

이진국 0 1 04.20 09:27
서울 여의도의 한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코스의 첫 번째 요리로 노란 꽃잎이 올라간 에피타이저가 나왔다. 예쁜 음식만큼이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육식물과 함께 이끼가 소복이 올라간 접시였다. 설마 하고 만져보니 진짜 살아 있는 이끼다. 요즘 식당가에서는 이끼와 드라이아이스 등을 활용해 주메뉴를 돋보이게 하는 플레이팅을 내놓는 곳이 있다. 한우와 같은 고급 식재료를 고객에게 선보일 때도 애용된다. 소셜미디어에 인증사진을 올리는 이들을 위한 촬영용 세팅이기도 하다. 한 이끼농장은 광화문과 여의도에 매장을 둔 한우전문점이 단골이라고 전했다.
축축한 음지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어둠의 식물’ 이끼가 양지에서 사랑받고 있다. 그 옛날 식물채집 숙제 때나 눈여겨보던 이끼의 대중적인 인기를 이끈 것은 테라리엄이다. 유리 용기, 수조 등에 이끼와 작은 식물, 소품 등의 오브제를 활용해 나만의 작은 숲을 만드는 식물 공예 ‘테라리엄’은 반려식물 트렌드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주로 실내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활용하는데, 이끼가 필수 재료다.
독일마이스터 플로리스트 박민지씨는 테라리엄은 유럽에서는 1900년대 초반부터 있었던 문화인데, 반려식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식물에 대한 관심이 찾아낸 트렌드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최근 2~3년 부쩍 마니아층이 증가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얻는 ‘식물 멍’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박씨는 습도가 높은 기후 여건상 이끼가 잘 자라 테라리엄 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버섯 테라리엄이 유행이라고 전했다. 유리 용기가 아닌 돌 위에 식물을 심는 석부작 분경도 이끼 공예의 또 다른 유형이다.
테라리엄은 포인트 플랜테리어로 사랑받는 ‘관상용’에 그치지 않는다. 테라리엄을 직접 만드는 클래스도 성업 중이다. 힐링 받고 간다는 후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재료비와 강습비를 합쳐 4만원에서 10만원 상당의 비용임에도 찾는 예약자가 줄을 잇는다. 관공서나 지자체에서도 심심찮게 관련 클래스가 열린다. 박민지씨는 심리적인 치유 목적으로 식물을 활용하는 것이라며 현대인이 가진 자연 결핍을 채우는 데에도 효과적이라고 추천했다. 클래스를 굳이 찾지 않아도 온라인을 통해 이끼 테라리엄 키트를 구입해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최근 집 안에 비바리움을 꾸민 김대호 아나운서의 일상이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되면서 테라리엄은 또 한 번 관심을 받았다. 비바리움은 식물만 키우는 테라리엄과 달리 양서류나 곤충 등 동물을 함께 사육한다. 지난달 김 아나운서는 유튜브 채널 14F ‘4춘기(40대의 취미를 찾아서)’ 코너에서 이끼공예가 삭(박웅택) 작가와 함께 테라리엄을 만드는 영상을 공개했다. 그는 코로나 때 뭐가 재밌을까 찾다가 인터넷에서 영상으로 비바리움을 접했다며 자연의 일부를 집 안에 둘 수 있는 점에 반했다고 전했다. 관련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테라리엄의 인기가 급상승했다고 입을 모은다. 강제 격리 시기, 유리 용기 안에 나만의 작은 지구, 오롯한 생태계를 만들며 많은 사람이 안도감을 느꼈다.
이끼는 바로 심자마자 오래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생동감을 주는 모순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태초의 자연과 같은 모습이 마음을 차분하게 하죠.
삭 작가의 작품과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에는 위안을 얻고 간다는 댓글이 유독 많다. 구독자의 상당수가 외국인이다.
서울 신당동의 ‘카페 이끼’는 벽면과 테이블까지 온통 이끼로 채워진 본격 테라리엄 카페다. 지난해 말 카페를 연 최준영 사장은 테라리엄을 기반으로 한 인테리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람을 생물로 둔 비바리움으로 꾸민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본업이 의류디자이너인 최 사장은 공기가 열악한 곳에서 근무하는 인근 봉제공장 밀집 지역 종사자들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유튜브 영상을 보며 독학해 카페를 꾸몄다는 그는 테라리엄 클래스를 여는 등 고객들이 이끼와 친숙해질 수 있는 이벤트를 벌일 계획이다.
고목에나 습지에서 자라는 이끼는 육상 생활에 적응한 최초의 식물로 선태식물이라 불린다. 크게 선류(솔이끼 등), 태류(우산이끼 등), 각태류(뿔이끼 등)로 구분한다. 전 세계적으로 2만여종이, 우리나라에는 약 950종이 분포하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 화단에서는 주름솔이끼, 털깃털이끼, 양털이끼 등, 보도블록 틈에서는 담뱃잎이끼, 은이끼 등, 산책로에서는 들솔이끼, 억새이끼 등을 볼 수 있다.
이끼는 조경 소재로 먼저 각광받았다. 정부세종청사 옥상 조경을 담당한 미니분경의 윤태근 대표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노지 월동이 가능해 사계절 내내 정원의 푸르름을 유지해주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이끼의 옥상녹화로 단열효과를 통한 에너지 절약 효과를 보고 있는 곳도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인삼 포장의 부재료로 널리 쓰이며 무분별 채취로 인한 생태계 파괴 우려를 낳았던 이끼는 재배를 통해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서 ‘샘플러’를 구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시장화됐다. 한 촉당 몇천원 선에 판매하는 나무이끼 종류도 있지만, 대부분은 저렴한 수준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양지에서도 잘 자라며 조경에 많이 쓰이는 서리이끼의 거래가 가장 활발하다.
삭 작가는 이끼를 키우기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끼는 그늘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자연의 그늘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그는 실내에서 키울 경우 조명은 물론 환기도 필수라며 무조건 습하게 키워야 하는 식물이 아니며, 종류도 많으니 이끼별 생장 조건에 대해 공부하고 그 이끼가 살던 공간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인스타 팔로워 구매 강조했다. 이끼 및 조경전문가들이 쓴 <실내에서 이끼 키우기>에 따르면 이끼의 생육 온도는 0~25도, 생장이 활발한 적정 온도는 18~25도이다. 전반적으로 시원하게 관리해야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다. 고온다습한 환경은 이끼를 갈색으로 변하게 하거나 곰팡이, 입 무름 등을 유발한다. 이끼는 계속해서 자라고 번지기 때문에 잘 관리하면 평생을 두고 볼 수도 있다.
6년 전부터 이끼를 재배하고 있는 윤 대표는 이끼 재배는 쉬우면서도 어렵다고 말한다. ‘흔해 빠진’ 식물이라 쑥쑥 자랄 것 같지만, 판매가 가능할 정도로 자라려면 보통 2년이 걸린다. 야생에서는 포자부터 성체까지 이끼가 정착하는 데에 이보다 긴 4~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인스타 팔로워 구매 때문에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은 상태다. 현재 국내에서는 10여종이 재배되고 있다.
윤 대표는 현재 이끼 시장에서 테라리엄 관련 소비는 10%가량이라며, 기후 위기 시대를 맞아 이끼의 탄소 저감 효과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생의 자원은 한정적이며 자연 훼손의 우려가 크다는 점도 이끼 재배의 본격화를 강조하는 이유다. 이끼는 공기오염의 지표 식물이다. 2022년 한 연구(<이끼를 활용한 공기정화 시스템 개발 및 이끼별 공기정화 능력평가> 안도현 외)는 전국적으로 유통량이 많은 우산이끼, 쥐꼬리이끼, 깃털이끼, 비단이끼를 대상으로 미세먼지, 혼합가스, CO2의 감소 효과에 대해 실험한 결과 모든 이끼에서 공기정화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탄소저감 효과와 친환경 산업 소재로 이끼의 효용에 주목하고 있지만, 관련 움직임은 더디다. 다년간 이끼 재배 기술을 연구해온 충북대 원예과학과 이철희 명예교수는 공기와 중금속 정화 기능 등의 환경적인 측면 외에도 의약품이나 식품 영역 등 이끼의 용처가 많지만 이것을 구체화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직 미미한 것이 아쉽다며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재배에 나설 수 있도록 정책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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