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 팔로워 구매 함경도 명승 10곳 그린 19세기 미공개 실경산수화 발굴·공개

인스타 팔로워 구매 함경도 명승 10곳 그린 19세기 미공개 실경산수화 발굴·공개

이진국 0 9 05.11 00:16
인스타 팔로워 구매 인문지리적으로 관북(關北) 지방이라 불리는 함경도의 명승·명소 10곳을 그린 19세기 미공개 실경산수화 ‘관북십경도(關北十景圖)’가 처음 공개됐다.
‘관북십경도’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작인데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관북 10경도 가운데 최대 규모의 작품이다. 12폭 병풍으로, 짜임새 있는 구도와 정교한 세부 필치 등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 조선시대 실경산수화는 물론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경산수화는 제작 당시의 정치·사회·문화적 정황을 시각적으로 담아내 역사적·학술적 의미도 크다. ‘관북십경도’는 명승 10곳을 그린 10폭과 명승의 역사적·인문지리적 해설을 기록한 화기(畵記)이자 기문(記文) 2폭으로 구성됐다. 제작 연대·화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기문과 화면 내용, 표구형식 등을 통해 19세기 후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제작 당시 최북단 국경지역에 대한 정보,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있다.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관북십경도’는 미술품 수장고 전문업체인 더프리포트(The Free Port) 전윤수 대표(전 중국미술연구소 소장)가 7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전 대표는 ‘관북십경도’는 개인소장품으로, 최근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학술적으로 소중한 미공개 작품’이라는 감정·분석 평가를 받아 널리 알리고 공유하기 위해 공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 대표는 미술사를 공부한 중국미술 전문가로, 일본에 유출된 조선시대 지석(誌石·죽은 이의 이름·이력 등을 새겨 무덤 앞에 묻는 돌판) 등을 환수해 국립고궁박물관·국립광주박물관·한국국학진흥원 등에 기증해 주목받기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관북십경도’는 비단 위에 수묵담채로 그려졌다. 19세기 말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체 크기는 너비 519.6㎝, 높이 230㎝의 대작이다. 각 폭 화면은 가로 31㎝ 안팎, 세로 169㎝다. 화면의 폭이 좁고 세로로 긴 것은 이 시기 병풍그림의 특징 중 하나다. 워낙 대작이라 공공 건물 등 규모 있는 공간에 배치돼 웅장한 모습을 연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북십경도’에 그려진 관북(북관)지방의 명승은 저마다 빼어난 경치와 유적 등 자연·문화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안변의 학포(鶴浦)와 국도(國島)·석왕사(釋王寺), 정평의 도안사(道安寺), 길주의 성진진(城津鎭), 명천의 칠보산(七寶山),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경흥의 무이보(撫夷堡), 경원의 용당(龍堂), 갑산의 괘궁정(掛弓亭)이다.
제1폭은 학포 등 5곳의 기문이며, 제2폭은 ‘학포’란 제목 아래 수려한 자연경관의 학포를, 제3폭은 ‘국도’란 이름으로 바다의 섬이자 해당화·대나무·기이한 바위들로 유명한 국도 일대 풍광을 그렸다. 제4폭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꾸고 세웠다는 설봉산 석왕사 주변을 담았다. 기문을 보면, 태조가 잠룡 시절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을 꿨고, 토굴의 승려에게 의미를 물으니 ‘서까래 세 개는 王(왕)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승려가 바로 무학대사다.
제5폭은 정평의 도안사, 제6폭은 길주의 군사진지 유적인 성진진이다. 기문은 ‘3면이 바다이며 옛날에는 토성이 있었지만 1606년(선조39) 진을 설치했고 1615년(광해군 7)에는 석성을 쌓았다’고 설명한다. 제7폭은 지금도 유명한 명천의 칠보산을 개심사와 금강굴·연적봉 등과 함께 담아냈다. 기문에는 칠보산의 유래, 산 정상에 쌓인 조개·소라 껍데기로 이 산이 바다에 잠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혔다.
제8폭은 임진왜란 때 북관대첩을 이끈 의병장 정문부(1565~1624)를 기리는 사당인 창렬사 일대다. 정문부는 북한의 국보인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북관대첩비’는 일본으로 유출된 것을 남북한 협력으로 서울로 환수한 뒤 북한에 인계해 함경도 원래 자리에 설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9폭은 두만강변의 군사시설 ‘무이보’가 소재다. 기문에서는 두만강 너머와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활동한 지역으로 8개의 연못이 있는 팔지(八池) 일대 등을 설명한다.
제10폭은 조선 태종 때 쌓은 동림산성 동쪽의 사당인 용당을 그렸다. 기문에는 ‘두만강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도 있다. 제11폭은 갑산의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진 괘궁정 일대를 담아냈다. 기문은 ‘아! 이곳은 백두산의 뿌리요 압록강의 근원이니 천하의 외진 곳’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제12폭은 칠보산 등 5곳 명승에 관한 기문이다.
미술사학자인 박정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작품이라 조선 후기 회화, 특히 실경산수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며 관북 10경도 중 최대 대작이자 작품의 수준도 높다. 명승 화면에 기문을 쓴 기존 작품들과 달리 기문을 별도 폭에 모아 적은 것도 특징이라고 밝혔다.
동아시아 실경산수화를 연구하는 박 교수는 ‘조선후기 명승과 명승도 향유양상-한중명승도첩을 중심으로’ ‘조선 후반기 관북명승도 연구’ 등의 논문, 서북지역 실경산수화의 시기별 흐름과 제작배경·전래 현황·회화적 특징을 분석한 연구서 ‘조선시대 평안도 함경도 실경산수화’ 등을 저술했다.
박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의 명승·명소를 8경 혹은 10경 등으로 선정해 문학·회화의 제재로 삼는 문화가 성행했는데, ‘관북십경도’도 그 선상에 있다며 다만 관북지방은 한반도 최북단, 변방으로 소외되면서 타지역보다 화가들의 관심을 덜 받았고, 수량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에 따르면, 관북 명승의 시각화는 1664년 길주에서 치러진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파견된 김수항(1629~1689)을 수행한 화원 한시각이 그린 ‘북관수창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후 관북 명승도는 약천 남구만(1629~1711)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제작이 본격화됐고, 1674년에 남구만의 기문이 적힌 ‘함흥십경도’ ‘북관십경도’가 완성됐다. 당시의 ‘남구만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본을 짐작할 수 있는 ‘함흥내외십경도’(1731년경)가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박 교수는 현존하는 관북명승도는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남구만본’의 형식·내용을 따른 지역 화가들의 임모작과 조중묵의 ‘관북십승도’(1890)처럼 중앙의 화원들이 남종화풍으로 그린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초 ‘남구만본’ 계열에 비해 중앙 화단 작가들의 작품에 한층 세련되고 안정된 필묵법이 구사돼 있다며 공개된 ‘북관십경도’는 중앙 화원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18~19세기 관북 명승도 제작이 당시 북방 영토에의 관심, 특히 청나라와의 국경선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논란이나 간도 영유권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조선과 청나라는 1712년 백두산에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하지만 고종대인 1885년을 전후해 동쪽 경계인 ‘토문’을 놓고 청나라는 두만강, 조선은 만주 송화강 일대라고 주장하며 큰 갈등을 빚자 두만강 너머 간도 일대에 대한 국내 관심이 높아졌다. 실제 이같은 관심은 ‘북관십경도’에 간도 일대를 강조해 담거나(무이보), 현장에선 보이지 않는 백두산과 천지를 표현한 장면(괘궁정) 등에서 엿보인다.
박 교수는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명승도 연구가 활발하지만 관북지방은 소외돼 연구가 미진하다며 ‘관북십경도’ 발굴을 계기로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전윤수 대표는 ‘관북십경도’가 학계에는 좋은 학술 자료로, 미술애호가들에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 민정수석비서관실을 복원하면서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 때 법무부에 만든 인사정보관리단이 존속할지가 주목된다. 대통령실과 법무부 측이 존속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부활한 민정수석실이 과거처럼 공직자 인사검증을 주도하게 되면서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은 한 전 장관 재임 때인 2022년 5월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폐지에 따라 설치됐다. 법무부는 당시 인사정보관리단에 대해 대통령의 ‘법의 지배’ 강조와 대통령실의 권한 내려놓기 차원이라며 민정수석실을 폐지하는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이뤄진 조치라고 설명했다. 또 공직자 검증이 밀실에서 이뤄진다는 과거 민정수석실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 통상의 부처 업무에 편입시킨 것이라며 인사검증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제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 전 장관도 2021년 10월 국회에서 과거에는 민정수석실이 자료 수집과 판단기능을 같이 독점하는 상황이었다며 견제와 균형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사정보관리단 설치는) 진전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들어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 내정자,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김행 전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등 수차례 부실 인사검증 논란이 불거졌다. 그때마다 법무부 책임론이 제기됐지만 법무부 측은 기계적인 1차 검증만 담당한다며 책임을 피해갔다. 구체적인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 대통령실 견제와 투명화라는 당초 출범 취지는 사라진 것이다.
대통령실은 지난 7일 민정수석실 부활을 발표하면서 민정수석실이 인사검증을 다시 주도하는 것인지,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역할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날 법무부 관계자도 정해진 바가 없다고만 말했다.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존속하더라도 민정수석은 ‘왕수석’으로 불릴 정도로 권한이 막강한데다 김주현 신임 민정수석이 검사 출신이라 인사검증에서 민정수석실 주도권이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역할은 더욱 협소해진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8일 민정수석실이 법무부에 줬던 인사정보 관리체제를 거둬들인다면 결국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은 한 전 장관을 위해 조직과 권한을 넘겼던 위인설관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하다며 법무부가 인사정보관리단을 만든 가장 큰 명분이 인사정책의 투명화였는데, 다시 민정수석실로 돌아간다면 투명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를 대통령실이 답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 교수는 이어 민정수석실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병존하는 체제로 갔을 때 자칫 잘못하면 민정수석실의 사정기능과 결합되면서 법무부나 검찰이 민정수석실에 예속되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며 법무부가 형식적인 허수아비 조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정수석실 부활이)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실패를 인정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어떤 의미로 한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며 없앴던 민정수석실을 다시 부활함으로써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 없는 게 문제로 보인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이는 결국 법무부의 인사검증이 하나마나한 역할이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며 법무부에 인사 관련 권한을 그대로 둔다면 법무부가 민정수석을 어떻게 통제한다는 것인지, 법무부 장관과 민정수석 간에 서로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도 핵심이라고 했다. 이어 민정수석실이 권력 오남용과 사정기관들에 대한 대통령의 영향력 행사 연결고리로 이야기돼온 상황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을 하는 것인지에 관한 해명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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